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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조선민족영렬들8]-조선의용군전사들의 무덤 누가 지키나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2-26 13:20:12 ] 클릭: [ ]

중한수교 20돐 특별기획

60여년간 조선의용군전사들의 무덤을 지켜준 산서성좌권현동욕진상무촌의 조은경(赵恩庆)할아버지.

1941년 1월10일, 무정, 진광화, 리유민 등이 기열료군구 태항산분구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桐峪镇上武村)에서《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건립하고 산하에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를 세워 화북의 20만 조선인들의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고 뜻있는 조선청년들을 불러들여 이곳에서 학습하고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각지의 의용대의 태항산근거지로의 북상을 조직하였는데 이곳은 조선의용대가 첫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주둔지로 되였다.

1941년 6월, 국민당구역의 조선의용대주력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함으로써 팔로군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자는 147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조선청년련합회에 받아들여 의용대로 재편성함이 필요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인 무정은 연안에 있었기때문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분회 회장을 맡았던 진광화와 부회장 윤세주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지도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7.7》사변기념일인 7월 7일에 결성되였다.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고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화북지대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였다.

재편성을 거친 화북지대는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분회의 지도밑에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후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화북지대 각대는 구역을 나누어 하북 평한철도구역으로 진출해 무장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중국민중에게 항일사상을 전수하면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보루나 초소에 접근하여 함화하기도 하였으며 일본군병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제국주의자의 희생물로 되지 말것을 권고하였다. 또 도처에 선전표어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했으며 도로, 철도를 파괴하고 전선(電線)을 절단하는 등 파괴활동을 진행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화북지대는 유명한 선옹채전투, 호가장전투, 형대전투, 5월 반소탕혈전을 겪었다. 그리고 북경, 천진, 상해, 청도, 무한, 중경 각지에 파견된 대원들도 각지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면서 조직세를 확대시켜나갔다. 그 속에서 적지 않은 희생을 내였던것이다.

지금 이 마을입구에는 산서성 좌권현 정부와 대한민국 순국렬사유족회가 함께 세운 《조선의용군태항산지구항일전순국선렬전적비》가 우뚝 솟아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조선의용군렬사들의 명복을 비는 추모제를 지내고있었는데 마을뒤산에는 이름도 알수 없는 조선의용군전사들의 무덤이 있다. 마을의 83세나는 조은경(赵恩庆)할아버지는 65년간 이 주인 없는 무덤을 지켜오면서 무주고혼들을 위로하고있었다.

조선의용대전사들이 주숙을 정했던 옛 흙토담집에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 조은경할아버지는 자신이 여라문살 되던 해에 조선의용대전사들이 이 마을에 왔다고,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항일선전사업을 하였고 촌민들을 위해 마당을 쓸어주고 물도 길어주면서 마을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고 소개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가 마을을 습격하였다. 마을에 있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신속히 마을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기관총으로 적을 막고싸웠다. 그들은 마을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대피한 다음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엄호가 있었기때문에 상무촌은 농민 한명이 숨지는 피해만 받았을뿐이다. 그러나 그번 토벌에서 유격대의 엄호를 받지 못한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농민이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조은경로인은 조선의용군은 마을사람을  구해준 은인이고 또 늘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서 그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마을뒤산에 묻힌 이름도 알수 없는 조선의용군전사들의 무덤을  60여년간을 줄
 
곧 해마다 벌초를 하고 부토를 하면서 지켜왔던것이다. 조은경로인의 사적이 실린 신문기사를 읽으며 우리 일행은 조선의용군전사들에 대한 조은경할아버지의 그 정성과 사랑을 가슴 뜨겁게 느끼게 되였다.

당년 태항산항일근거지는 조선의용대전사들이 동경하는 혁명의 성지였다. 이곳 태항산으로 향한 그 북상의 길에는 사연도 많았다. 1941년 첫날, 조선의용대본부의 북상항일의 결정에 따라 국민당군대의 눈을 피해 몰래 중경에서 민생호를 타고 떠난 조선의용대 대오속에는 스무나문살 되는 왕현순(일명 리정순이라고도 함)도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애티나는 얼굴, 새별처럼 빛나는 그의 두눈에서는 언제나 정기가 넘쳐 흘렀다.

전쟁의 포화가 울부짖는 나날에도 그는 맑스, 엥겔스, 레닌의 철학로작을 챙겨갖고다니며 틈만나면 말없이 책을 읽군 하였는데 그는 대오내의 가장 나어린 《철학가》로 사랑받았다. 한창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즐겁게 청춘을 보내야 왕현순이건만 혁명에 뜻을 두고 이역타향땅에서 풍찬로숙하며 나라를 빼앗은 원쑤놈들과 목숨 걸고 싸우고있는것이였다. 태항산에 들어선 그해 첫 전투인 호가장전투에서 그는 동지들을 엄호하가다 일본놈들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된다.

의용대 대원 호유백은 정치지도원 김학무, 《작가》 김학철 등과 함께 강행군도중 잡목림숲속에서 로숙하게 되였다. 그가 편한 자리를 찾아 한눈 붙이고 새벽녘에 일어나 떠날 차비를 하면서 보니 옆자리에 웬 시체가 누워있었다. 일행은 중구난방으로 재수가 붙겠다는둥 백살까지 살기는 떼놓은 당상이라는둥 부산을 피우며 골려주었다. 그 강행군에 이어 태항산에 이른후 어느 전투에서 전사 호유백동지는 적의 포위망에 들었다. 적들이 여라문 발자국앞까지 와 항복을 하라고 권유하자 그는 픽 웃으며 마지막 권총알로 자기의 관자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홍복사는 원래 큰 사원이였지만 일제놈들이 불을 질러 지금은 단층집만 남아있다.집앞에는 《조선의용대주둔지》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당시 국민당제1전구 장관사령부에서 사업하던 문정일동지(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는 팔로군총부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으로 가는 도강수속을 해주는 간고한 임무를 맡고 락양에서 비밀리에 4차에 걸쳐 의용대를 이동시키였다. 나중에 그도 의용대 로약자들과 20여명의 공산당지하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국민당봉쇄구역을 빠져나오다가 국민당부대를 만나 장관놈을 지혜롭게 속여넘기고 그들의 엄호를 받으며 무사히 태항산해방구에 들어서게 된다.

그 길에서 그들은 몇번이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그는 또 조선의용군총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과 괴뢰군에 대한 통일전선사업을 하는 한편 적후의 광범한 조선청년들을 동원하여 항전에 참가시키는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때론 국민당장관복장을 차려입고 때로는 장사군차림을 해가면서 화북의 뜻있는 조선청년들을 찾아 그들을 설복교양하여 지하당조직망을 통하여 태항산으로 인도하였다.또는 일본군과 국민당군에 있는 조선인들을 설복하여 그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어내여 팔로군에 제공함으로써 항전승리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진기로예렬사릉원일각.

마전팔로군전선총지휘부기념관.

태항산에 이른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통일지휘아래 본격적으로 대일작전을 전개하였다. 중앙군관학교출신이며 기관총, 보총, 권총 닥치는대로 잘 쏘는 명사수 문명철(본명 김일곤)은 작달막한 키에 강퍅하게 생겼으며 전쟁마당에서는 두눈에 불을 펄펄 일구는 용맹한 호랑이 같았다. 그는 하모니카도 잘 불었고 시도 잘 썼다. 그 어려운 전쟁의 나날에도 하모니카만은 늘 보배처럼 지니고 다니다가 틈만 나면 꺼내 불군 하였다.

강서전선의 처절한 전장터에서 전선부녀공작을 나온 한족처녀 윤복구와 함께 전쟁의 세례를 이겨나가면서 그들은 사랑을 속삭이게 되였다. 윤복구가 오락판에서 노래를 부르게 될 때마다 《으흠 으흠》 하면서 옆에 앉아있는 그에게 모름지기 《요청》을 해오면 문명철은 제꺽 눈치채고 호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들고 성수나게 반주를 해주군 하였다.

휴전선의 오락판에서 늘 태항산의 정적을 깨우며 고향노래를 구성지게 들려주던 문명철의 하모니카소리, 1943년 봄 그때부터 더는 그의 하모니카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942년 5월 반《소탕》전에서 조선의용대에 한대 밖에 없는 경기관총으로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던 문명철, 이듬해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의 조직위원으로 전근되여 사업하던 그는 적들의 포위공격에 빠지게 되였다. 우리의 명사수 문명철은 일당백으로 두 팔로군전사와 함께 적군과 맞불질하다가 탄알이 떨어졌다. 그는 마지막 수류탄을 뽑아들고 적무리에 뛰여들어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그는 29살이였다.

의용군전사들은 《조선의용군의 3대각오- 적의 총탄에 맞아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로 무장되여있었다.그들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길에서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던것이다. 1941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화북전장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전사들만도 20여명 된다. 1943년 6월 18일부 연안《해방일보》기재에 따르면 당년 조선의용군 지도자 무정동지는 문명철 등 조선의용군동지를 추모하는 대회에서 《…나는 이 추도회에서 피와 힘이 솟구침을 느낄뿐 애상의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우리는 최대의 희생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희생된이들을 위해 복수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비분에 넘쳐 연설하였다.

오늘날 청장하수리건설일경.

먼 후날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정부 제1임부주석, 중공길림성 통전부 부부장 겸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사업하다가 리직휴양한 로일대혁명가 최채동지는 10년전 한 조선족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문명철이와 함께 태항산에서 싸워온 지난날을 추억하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는 그의 무덤이 딱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오. 좌권현경내 어디에 있을거라고 짐작하고있을뿐이요. 그러나 지금도 조용한 밤 눈감으면 문명철의 하모니카소리가 들린답니다.》라고 하면서 태항산전우들을 심심히 그리고 계셨다.

연변작가협회 기발로, 등대로 살다가신 김학철선생은 태항산전우들을 그리는 글에서 《나는 아직까지 그들의 무덤을 찾아 풀 한번 깎아본적 없다. 하긴 그들은 대개 죽은 뒤에 무덤도 안 남겼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기념하는 글을 써서 가슴속 깊이 그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면서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갈수밖에 없는것 같다. 그들의 본명과 고향에 대해서도 우리들, 요행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는바가 극히 적다. 그래도 우리는 반세기전에 로신이 그의 젊은벗들의 죽음을 애도해 쓴 〈망각을 위한 기념》같은것을 써야 할것이 아닌가!》 하며 전사들을 마음의 기념비로 세워주셨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을 안내하던 상영생관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사업하던 관건동지(원명 황재연)의 골회가 진광화와 윤세주렬사 묘소사이에 묻혀있다고 소개하였다. 1984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의 간부들이 태항산고찰을 할 때 관건동지의 골회를 가져다 이곳에 묻었다고 하였다. 관건은 태항산에서 싸우던 그 뜻깊은 나날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것이라고 하면서 죽은 다음 진광화와 윤세주가 묻힌 곳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관건의 원명은 황재연(黃載然)이다. 1910년, 길림성 쌍양현의 빈곤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였다. 할아버지에게서 글을 조금 배웠던 그는 1934년에 혁명의 길을 찾아 관내로 들어갔다. 관건은 남경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에 입학하였고 또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중국중앙륙군학교 강릉분교를 졸업하고 무한에서 조선의용대 제1대에 편입되였다.

1941년, 관건은 기타 대원들과 함께 락양을 거쳐 태항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리익성이 거느린 제1대와 함께 안양(安陽)부근에서 선전활동을 하였고 그후 화북독립동맹 태악분맹(太岳分盟)사업을 맡아보았다. 태항산에서 관건은 조선청년련합회 간부로 사업하면서 진광화, 윤세주와 두터운 정을 쌓았다. 1943년 봄부터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공급관리원으로 책임을 맡고 일본군의 토벌에 당면하여 언제나 대오보다 먼저 목적지에 가서 전사들의 먹거리, 잠자리를 마련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걷고 잠도 적게 자면서 헌신적으로 사업한 조선의용군내의 살림군이였다.

 
1984년 태항산고찰에 나선 원 조선의용군 항일간부들.

1984년,연변주정협 부주석 황재연동지의 골회를 진광화, 윤세주렬사 초장지사이에 묻었다.

 골회를 묻은 평지땅에 애솔나무를 심어 기념으로 남겼는데 푸르싱싱 자란 소나무는 초병처럼 태항산을 지키고있다 .  

1984년경에 황재연동지가 세상뜨자 자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태항산전우들의 안내를 받으며 여기 태항산으로 찾아왔던것이다. 당시 골회를 석정 윤세주와 진광화의 초장지사이에 안치하고 그앞에 작은 애솔나무를 심어 표기했었다.

당년에도 오늘에도 태항산전사들의 영원한 동경으로 되고있는 태항산 여느 골짜기, 여느 산자락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조선의용군용사들의 영웅형상과 그 기백을 다시한번 듣고 느끼노라니 국민당구역으로부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향한 북상의 길에서 조선의용군전사들이 목청껏 불렀다는 그 노래, 《우리는 태항산에서》를 떠올리게 되였다.

우리는 태항산우에,

우리는 태항산우에

산은 높고 물은 깊네

수수는 무성하고 말은 살찌네

적들이 어디로 쳐들어오면

우리는 어데 가서 적들을 소멸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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