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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속에 우뚝 선 조선족마을 동안촌

편집/기자: [ 장춘영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11-29 10:20:10 ] 클릭: [ ]

[조선족농촌에 가보다] - 새농촌건설에서의 통화현 조선족농촌 현황(1)

통화현에는 금두조선족만족향과 대천원만족조선족향이 있으며 14개 조선족촌에 60개 촌민소조가 있다. 조선족인구가 1만 2000여명 되는데 통화현 전체 인구의 4.8%를 차지한다. 근년래 새농촌건설과 도시화건설로 적지 않은 조선족농민들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농민들은 농촌에서 살지만 도시에 못지 않은 생활을 누리고있고 일부 농민들은 도시주민과 융합되여 도시생활을 하고있다.

허나 자원우세가 결핍하고 사회교류범위가 좁고 투자환경이 빈약한 등 원인으로 조선족농촌의 경제발전이 다른 촌에 비해 더디고 촌경제수입도 거의 없다싶이 하여 조선족촌민들은 근근이 잘먹고 잘입는데만 그칠뿐이다.

지난 11월초 기자일행은 통화현민족종교국의 박우영국장의 추천과 리춘원부국장의 안내하에 통화현 쾌대무진의 동안촌, 강전진의 서선촌, 쾌대무진의 하선촌,금두조선족만족향의 광신촌을 돌아보았다. 기타 조선족촌들과 마찬가지로 이 4개 조선족촌에도 청장년 대부분이 연해지역이나 한국로무로 자리를 비웠는바 촌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이 로인과 아이들이였다. 아래 우리는 4기를 나누어 안동촌, 서선촌, 하선촌, 광신촌의 현재 발전상황을 소개한다. - 편자

도시속에 우뚝 선 조선족농촌마을 동안촌

-도시화건설에서 나타난 양로 재산관리 문제해결이 급선무

동안촌 리명성서기.

동안촌은 통화현 소재지인 쾌대무진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통화현 14개 조선족촌중에서 제일 큰 촌이며 통화현 새농촌건설에서의 선진촌이다. 동안촌은 시내중심과 잇닿아 있는터라 도시확장으로 벌써부터 도시속의 농촌마을로 되였다. 동안촌은 가치가 수백만원에 이르는 재산도 있는바 도시화건설에서 농촌이 도시가 되고 농민이 시민이 되는 급행렬차를 탄셈이다.

농민이 없는 농촌동네

동안촌은 지난세기 50년대에 설립되고 초대 서기는 배윤태, 초대 촌장은 장치일이다. 주로 벼농사를 해왔는데 계획경제시대에 촌에는 인삼산업이 있었고 불도저 두대, 뜨락또르 한대, 트럭 한대 등이 있었다. 호도거리후 촌집체경제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1992년 통화에 있는 석유회사에서 20여무 되는 토지를 징용하면서 동안촌의 토지는 해마다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5년 말 동안촌은 총 면적이 1만 6000평방메터 되는 아빠트 3동을 건설하였는데 촌민의 60%가 새층집에 들었다. 이는 호도거리를 시작해서1986년 3월 제1임 촌장으로 지금까지 25년간 촌주임, 촌서기를 담당하면서 촌을 지켜온 올해 58세 나는 리명성서기의 굳은 신념으로 이루어진것이다.

당시 토지징용으로 동안촌 촌민들이 뿔뿔이 해체될 위험에 처해있을 때 리명성을 비롯한 당년의 촌간부들은 조선족집중촌을 건설해야 만이 동안촌이 살아남을수 있다고 판단하고 발이 닳도록 정부로 뛰여다니고 촌민들을 설복하고 또 설복하면서 결연히 지금의 아빠트 3동을 지었다.

통화현 쾌대무진은 몇년전에 벌써 전국 10대 위생향진의 하나로 산좋고 물좋은 고장인지라 휘남, 매하구, 류하 등지의 조선족촌민들이 동안촌에 모여들어 현재 168채중의 25%는 이들이 들고있다. 리명성서기는 그때 한평방메터에 1100원했는데 지금은 집값이 올라 3000여원 한다고 했다.

동안촌에는 6개 촌민소조에 1700 (1무에 약 667평방메터) 여무토지에 1280여명 인구가 있었는데 인구마이너스 성장으로 현재 호적에 있는 인구는 1200여명이다. 800여명 로력중에 300여명이 한국로무를 떠나고 500여명이 국내연해도시에서 근무하고있으며 수명이 통화지역에서 식당 등 자그마한 가게를 꾸리고있다.

리명성서기는 《2000년부터 동안촌의 토지가 대량 징용되기 시작하면서 선후 통화신룡약공장, 통화화신약업, 통화통천술업, 통화동보약업주식회사, 통화승흠부동산회사 등에서 련이어 동안촌의 토지를 징용했다》며 《현재 동안촌에는 5200여립방메터 되는 인공림과 400여립방메터 되는 활엽림이 있고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학교건설에 투자한 돈 200여만원이 있으며 300여무 되는 토지가 남아있다. 이 300여무 토지도 이제 곧 통화현물류업체에서 징용하면서 동안촌은 인젠 토지가 없는 도시속의 촌마을이 된다》고 했다.

빚꾸러기촌이 조선족사회에 기부하는 부유촌으로

1986년 3월 리명성서기가 촌장으로 부임되였을 때 촌에는 촌사무실을 지으면서 진 빚이 30여만원이나 있었다. 산업경제수입이 없고 벼농사만 지어오던 동안촌, 그것도 동안촌 인당 평균 토지면적이 고작 1.32무밖에 안돼 집체경제수입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촌민위원회는 2000년에 본금과 리자까지 몽땅 갚았다. 현재의 촌경제수입이란 주로 가게임대료인데 1년에 약 36만원이 들어온다.

리명성서기에 따르면 촌에서는 수년전부터 80여명 되는 70세이상 로인들에게 해마다 300원씩 보조금을 주며 동안촌로인협회에서 큰 행사를 조직하거나 마을환경위생 건설에 나설때마다 5,6000원씩 자금을 보내준다. 3년 사이에 로인협회에서 무용복을 사고 들놀이, 유람을 하고 형제 로인협회 방문 등에 지원한 자금이 10여만원이나 된다.

촌에서는 또 통화현조선족유치원에 1만 5000여원 되는 유치원놀이용 비행기를 사주고 동안중심소학교에 의자를 사주는 등 많은 지원을 해왔는데 몇년사이에 20여만원을 지원했다.

통화현민족종교국 박우영국장(오른쪽 첫번째), 리춘원 부국장(중간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있는 리명성서기.

도시화건설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

동안촌은 쾌대무진 시가지와 잇닿아 있기에 통화현 새농촌건설 시점을 시작하기전부터 대량의 토지가 징용되였다. 1992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1700여무 되는 토지가 거의 징용되고있다. 토지 잃은 농민들의 양로문제, 토지징용으로 한꺼번에 큰 돈을 손에 쥔 농민들의 재산관리 등이 도시화건설에서 새로 나타나는 문제로 되고있다.

우리 일행이 동안촌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첫눈에 안겨오는것이 책상에 수부룩하게 쌓여놓은 신문이였다.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환구시보, 법제일보, 위생건강 등 7, 8가지는 잘 돼 보였다.

취재중에 리명성서기가 되풀이 하는 한마디가 있었는데 바로 조선족들의 종합자질이 내려가고있다는것이다. 그는 《배우려는 욕망이 없고 아는것이 적고 하면 자연 자식교육에서도 애로를 겪게 된다. 토지징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동안촌에도 국내외로 로무를 떠난 농민들이 많은데 할아버지, 할머니나 친척들에게 맡겨 자식들을 키우는 가정이 많다. 후대교육이 걱정이 된다》고 하면서 《농민들도 늘 배우고 보고듣고 <충전>해야 만이 명석한 두뇌로 앞날을 내다 보고 자체보호를 할수 있다. 토지징용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처리에서 지식이 모자람이 돌출하게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토지징용비로 양로는 가능할가?

《농촌토지문제》는 도시화건설과정중의 토지징용과 관련된다. 토지징용과정에서 농업토지용도가 바뀐후 그 가치수익과 비교해 볼 때 실제 농민들 손에 들어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동안촌에는 1700여무 토지에 호적에 있는 인구가 1280여명이다. 인구당 평균 1.32무 토지가 돌아간다. 2000년부터 대량적인 토지징용이 시작됐는데 2000년도에는 1무에 2만 3000원, 2005년에는 1무에 7만2000원, 지난해에는 1무에 13만 5000원 보상해주었다. 해당 규정에 좇아 한꺼번에 토지징용 보상비를 주는데 토지징용비중의 80%를 농민들에게 주고 20%는 촌공공자금으로 남겨둔다. 겉보기에는 수십년 농사지어야 손에 쥘수 있는 돈을 쥔듯 하지만 물가상승지수 등을 고려하면 이 돈으로 양로하려면 엄청 모자라는 수자이다.

알아본데 의하면 동안촌 촌민들은 신형농촌합작의료에는 참가했으나 다수는 양로보험에 참가하지 못했다 한다. 토지징용할 때 양로보험 참가여부에 관한 토론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30%, 개인이 30%, 촌민위원회에서 40% 내는 정책으로 개인이 약 2만여원만 내면 양로보험에 참가할수 있었다. 허나 일부 촌민들이 인젠 나이도 들고 또 세상을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합의를 달성하지 못해 양로보험에 참가하지 못한 상황이다. 예견성이 부족하고 멀리 내다보지 못한 결과이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는 리명성서기이다.

리서기에 따르면 현재 동안촌에서 신형농촌사회보험 통계사업을 진행하고있는데 기초양로금이 월 55원, 국가의 1196원의 빈곤부축표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다가 토지를 잃고 도시에서 살고있는 동안촌 촌민들로 말하면 농촌기본양로금은 별 의미가 없는것이다.

3분의 2의 촌민 재산관리에 무능

《토지재산》, 토지징용으로 받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이는 또 도시화건설로 도시생활을 하게 되는 농민들의 생활수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과제이다.

도시시민들과 비교해 볼 때 농민들은 재산관리 정보가 적고 재산관리지식이 결핍하다. 토지징용으로 받은 보상금을 합리적으로 사용해서 그 증가치를 실현해야 만이 앞으로의 생활을 보장할수 있다.

알아본데 의하면 동안촌 촌민들중의 대부분이 토지징용비를 은행에 저금한 상황이고 타당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농민도 있다 한다.

동안촌의 한 촌민가정은 원래는 극빈호여서 촌민위원회의 보조대상이였다. 토지징용으로 수십만원에 이르는 토지징용비를 받게 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돈의 일부는 친척이나 친구들한테 꿔주고 일부는 쓰다나니 현재 손에 있는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다.

리명성서기에 따르면 지역우세로 남보다 먼저 도시 시민으로 된 동안촌 촌민들은 층집에서 살지만 땅이 있을 때보다 지출이 뚜렷하게 많아진 현황이다. 촌민들중 3분의1 정도가 재산관리를 괜찮게 하지만 나머지는 재산관리를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다 한다. 그는 《토지징용으로 받은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7, 8년은 아무 걱정없이 생활할수 있으나 더 긴 시간을 버티기는 힘들것이다》고 예측했다.

집체재산이 수백만원에 달하는 《부자동네》동안촌, 어떻게 하면 촌민들이 더 안정적이고 더 윤택나는 생활을 누리게 할것인가는 리명성서기를 비롯한 촌간부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동안촌의 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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