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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적 박탈당했으나 당을 믿는 마음 여전했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9-05-23 10:52:48 ] 클릭: [ ]

◇ 변철호 21세때 길림성서 제일 처음으로 회덕현수전농민합작사 창설
◇ 8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조선족렬사들의 자료 수집정리

변철호선생(오른쪽 첫번째)

이제 다가오는 《7.1》이면 중국공산당 창립 88돐 되는 날이다. 매년 이날이 오면 입당선서문을 되뇌이면서 불편한 몸으로 당을 위해 우리 민족을 위해 한몸을 바치려는 한 로인이 있다.

이 로인이 바로 올해 81세 나는 장춘에 거주하고있는 변철호이다.

변철호라면 장춘에 있는 대부분 조선족유지인사들은 잘 알고있다. 그러나 역경속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신임을 버리지 않고 굳건히 공산당원의 본분을 지켜온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를것이다.

비밀리에 입당

80고령이지만 변철호는 《장춘조선족》편집기획을 맡고있으며 잊혀진 조선족렬사들의 자료수집과 렬사추모행사 등을 조직하고있다.

그의 남다른 정열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당원의 신분으로 더 많은 일을 하려 할 때 리직하게 되였다. 비록 리직하고 나이가 들었어도 무엇이든 하고싶다.》

1928년 4월 24일에 출생한 변철호는 1947년 12월 27일 19세때 입당했다. 그때는 비밀리에 조직생활을 할 때였다. 

림강보위전역이 끝난 후인 1947년 여름 변철호는 해룡현(지금의 매하구) 토지개혁공작단에 있었다.

해룡현토지개혁공작단은 남만지구토지개혁의 시범공작단으로서 그 규모와 지도력이 매우 강했다. 총부단장에 성당위 선전부장인 왕정이 맡았고 부단장은 성정부 오비서장이 맡았다. 각 분단 책임자도 현위위원들이 맡았다. 단원총수가 근 500명인데 이중에서 조선족이 50여명이나 있었다.

변철호에  따르면 조선족 단원들은 평소에는 각 분단에 배치되여 사업하다가 정책학습, 사업총화, 조선족농민과 관련되는 일이 있을 때면 총부에 있는 백운창, 전복민의 지도하에 단독으로 토론연구회를 가졌다.

그때 변철호는 일좌영구공작대에 있었다. 현당위선전부 원부장을 대장으로 10여명 조선족대원들이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는 세곳에 나뉘여 사업했다. 변철호는 대부에  남아 원부장의 지시를 전달하고 각 곳의 상황을 원부장한테 회보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의 인생관은 이 시기에 확고해졌다.

공작단은 단원들의 계급각오를 향상시키기 위해 가난했던 지난날의 고난을 하소연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때 변철호는 가정이 어려워 고등과(초중)를 채 마치지 못한 일, 삼심양항이란 상점에서 일할 때 조선인이라고 일본인과 조선인 헌병한테 멸시당하던  일을 얘기했다. 

 토지개혁이 한단락 끝나자 원부장이 변철호를 찾았다. 주로 정치형세에 대한 그의 인식을 물었고 토지개혁이 끝나면 무엇을 하겠는가를 물었다.

《집에 가 농사나 짓고 양이나 기르겠다》고 대답하자 원부장이 웃으면서 《쩐 쇼치, 응당 큰 포부를 가져야 하지.》 하며 나무람했다.    

그후 원부장이 여러 번 변철호를 찾아 공산당의 성질과 의무 등을 얘기해 주었고 공산당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년말총화회의에서 변철호의 사업회보가 잘 됐다고 평가받았고 그날 저녁으로 그는 회의실에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회의장에는 6, 7명 동지들이 앉아있었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변철호의 입당문제를 토론하는것이다. 변철호가 공산당에 대한 인식과 사업중의 우결점을 이야기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 견해를 발표했다. 계급각오가 높고 민족의식이 짙으며 고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했다. 한편 실사구시정신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회의휴식때 백운창이 변철호를 밖으로 부르더니 입당이 비준됐으며 입당선서식을 한다고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규범화된 입당선서문이  없었으며 자기의 인식대로  결심을 발표하면 된다. 나는 그날 백운창, 전복민 동지의 소개로 당기앞에서 입당선서를 했다》. 변철호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그때의 선서문을 되뇌인다.

《중국공산당을 따라 전 세계 무산계급을 해방하는 숭고한 혁명사업을 진행할것이며 어떤 곤난과 곡절이 있어도 절대 공산당을 배반하지 않겠다.》

루명쓰고 형사처분

그후 변철호는 해룡현조선인민민주련맹 선전위원으로 사업하다가 료서성(당시는 정가툰, 지금의 쌍료현)인민정부 민족과에, 회덕현에 파견되여 사업했다. 

당시 그의 사업열정은 매우 높았다. 얼마 안되는 사이에 그는 회덕현수전농민합작사, 조선족중학교, 민교관 등을 창설했다. 회덕현수전농민합작사는 당시에는 길림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세운 합작사였다. 이는  당지 민족사업을 위해 토대를 닦아놓은셈이다. 

1949년 봄, 변철호는 회덕현에서 주로 민족사업을 하는 동시에 현정부 당지부조직사업을 겸했다. 이때는 (1949년 3월부터는 당생활을 공개적으로 할 때이다) 한 공산당원으로서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당사업을 할 때였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 사업을 더는 할수 없게 되였다. 

1950년 봄, 변철호가 조직의 배치로 길림성 성당위로 전근하게 되였는데 그에 대한 회덕현의 사업감정(순定) 때문에 현지도부와 분쟁이 생겼다. 게다가 변철호가 하던 사업을 맡게 된 두 민족간부의 조작으로 그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처분까지 받고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로 인해 회덕현의 민족사업이 큰 좌절을 당했고 변철호 역시 고민속에서 허덕이였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당에서 자기에 대한 재심의를 다시 할것이고 꼭 억울함을 풀어줄것이라 굳게 믿었다. 

32년간 당생활 못한 아쉬움에서

조직의 배치로 변선생은 1953년부터 1960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에서 공부를 하였고 1960년부터 1970년에는 장춘시조선족중학교, 1970년부터 1989년 9월 리직할 때까지 농촌하향, 장춘시56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변철호는 《이 사이 나는  리론과 실제를 결합시켜 학습하면서 내가 한 일을 다시 돌이켜보았고  확실히 실사구시하지 못한 면도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신중하게 말했다.  

1978년 당중앙에서 력사상 잘못된 결론을 시정할데 관한 정책이 하달됐고 1982년 3월, 당에서는 변철호에 대한 형사처분을 철소하고 당적을 회복시켰다.

장장 3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떳떳한 당원의 신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고 무등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89년 9월에 정년리직하게 되였다. 

변철호는  《1954년에 안해 김애숙과 결혼한 우리는 5남매를 두었는데 나의 문제로 아이들이 힘겹게 살아왔다. 특히 큰 아들, 둘째 아들한테 큰 피해를 주었다》며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당원으로서 더 많이 일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사회와 우리 민족에 유조한 일이라면 적극 나섰다》고 실토정했다.

변철호는 선후 《중국조선민족 력사발자취(제 5권)》 편집기획을 맡았고 채규억, 김수영과 함께 《로인세계》잡지를 창간, 장춘해방전투에서 희생된 렬사들에 대한 자료수집 등 많은 일을 해왔다.

1997년 섣달 그믐날, 변철호는 사무를 보고 오던중 크게 다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허나 그는 채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며 여전히 분망히 보내고있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했던 생존자와 렬사유가족을 한자리에 모시지 못한 일, 654명 유골이 남아있는 길림시화피창렬사릉원 수건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해 유감이다》며 눈굽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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