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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년 력사의 회룡봉 가보다

편집/기자: [ 김영자,김성걸 사진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6-10-16 13:12:24 ] 클릭: [ ]

첫 조선족촌사 <<회룡봉>> 출판

두만강이 3면을 감돌아 흐르는 회룡봉,  거의 원형으로 돌아 흐르는 양을 룡이 돌아간다는 회룡(回龍)으로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 회룡봉, 훈춘시 경신진에 위치,  현재 회룡봉, 벌등, 로전 3개 행정촌으로 나뉘여졌으며  말짱 조선족이 살고있다.

우리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하여서부터 지금까지 144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는 회룡봉, 선조들의 발자취가 력력한 제1의 고향이며 조선족 항일의 고향, 혁명의 고향으로 불리우고있다.

회룡봉사람들은 드디여 소망해온 촌사 <<회룡봉>>을 만들어 한가위를 맞아 회룡봉144년 및 촌사<<회룡봉>> 출판기념잔치를 진행하였다.

경신진에서 남쪽으로 10키로메터가량 상거한 회령봉으로 가노라면 두만강이 강곬을 바꾸면서 생성한 넓은 개벌이 펼쳐지고  진펄과 띄염한 늪가에는 백학과 원앙이 노니는 모습도 보인다. 이맘때면 송어, 황어 등 바다고기들이 두만강으로 올라와 회룡봉사람들에게 별미를 더해주기도 한단다.

    잔치날 마을길은 뻐스, 승용차로 꽉 찼고 조용하기만 했던 회룡봉은 손님맞이, 행사준비에  아침부터 씨글벅쩍하였다. 길옆에서 아직 풀떡거리는 황어를 손질하는  아줌마들의 일손이 바빴는데 소도, 돼지도 잡았다며 오늘은 귀빈들과 온 회룡봉사람들이 고향맛오찬을 같  이 하게 된다고 한다. 회룡봉에서 이런 큰 잔치를 벌리는게 얼마만인지 모른다며  일손을 재우치는 모습모습들이 또한 오래간만에 볼수 있는 시골 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회룡봉사람들이 다 모여서기에 비좁은 회룡봉촌문화실마당.

    고향이 그리워 미국에서 온 84세의 박남표(항일투사 박지영의 장남, 한국 국방대학원 부원장, 론산훈련소 소장, 대한 싸이클련맹 회장, 한미 안보협회 임원을 력임, 동년, 소년시기를 회룡봉에서 보냄)선생 내외간을 비롯하여 회룡봉태생 혹은 회룡봉에 대한 깊은 추억과 관심을 갖고있는 정계, 교육, 학술계, 문화, 기업계 등 애향지사 수십명, 회룡봉집체호 때 형제들... 이 <<회룡봉>>을 펼쳐들며  감회에  눈굽을 적씬다.

    <<  이제 몇분뿐인 우리 선배들마저 이 세상을 떠나면 피눈물의 <회룡봉촌사>를 비롯한 고향의 력사는 땅속에 묻혀버리게 된다. 선조들의 땀과 피눈물의  개척사와 항일투쟁, 해방전쟁사와 고향건설사를  정리하여 세상과 후대들에게 남기여 고향의 새농촌건설에 일익하는 것이 바로 우리세대가 지닌 성스러운 사명이 아니겠는가...>>

    <<회룡봉>>촌사 편집위원회의 출판취지였다.

1860년이후 수년간 조선 북반부의 많은 리재민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옛조선말기 함경북도 리재민들이 강을 건너와  정착한 곳이 회룡봉이였다. 회룡봉마을이 생겨난것은 청나라 통치초년인 1862년, 처음엔 도(조)룡비(吊龍碑,강물이 룡두산을 에돌아 흐른다하여 래명 )라 불렀다가 위만주국시기에 회룡봉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리재민들은 갈밭, 쑥밭을 개간하여 옥답으로 만들면서 도룡비, 첫벌등, 중벌등, 상벌등, 헤대, 사간방, 넉덕미 등 일곱개 자연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1890년에 이르러 회룡봉엔 70여세대의 조선족인가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회룡봉에 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청나라정부〔훈춘부 산하에 이미 세연국(稅捐局)까지 설치〕에서는 아에 륙군대를 회룡봉에 파견하여 온갖 잡세를 거두어갈 때 즈음하여  그시기 일제놈들은 조선반도를 거쳐 중국 땅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회룡봉에 순정국을 설치하여 순정, 순관을 파견하여 소위의 지방치안을 구실로 민중들을 압박하였다. 회룡봉사람들은 이들과 맞서 싸워 순정국을 회룡봉에서 몰아냈었고 일제의 주구 여러집을 불살라버리기도 하였다. 쏘련사회주의 혁명의 영향과 중국공산당조직의 창건됨에 따라 1930년 중공훙춘현위가 창립되면서 그해 가을 경신구 구위원회를 회룡봉에 건립하였다. 얼마 안가 금구에는 당조직성원이 70여명으로 발전, 금구는 령남 항일 유격대의 창건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연통라자, 대황구 일대 유격전선과 항일근거지후원 및 통신련락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 혁명근거지였다.

독특한 지리적 위치로 하여 두만강량안 반일, 반봉건활동이 활발히 전개될수 있음을 감안한 일제놈들은 옥천동령사관외에 회령봉에 두개의 분세관을 설치하여 국제적래왕을 통제하고 또 회룡봉에 경찰분주소까지 설치하여 반일, 반봉건혁명활동에 대한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였다.

    회룡봉<<7인참안>>, 벌등<<6인참안>>, <<옥천동탈옥사건>>...회룡봉에는 처처에 항일의 이야기가 새겨져있고 일제의 죄행이 사무치고있다.

    1930년 가을부터 1933년 5월까지 리용되였던 벌등석굴,  놈들의 회령봉대토벌에 대처하던 많은 항일투사와 지하공작자, 그리고 항일유격대의 물품들을 은둔시켰던 항일혁명의 중요한 유적지가 지금도 그대로 기본상 원상을 보존하고있는데 여기에 금구의 많은 항일이야기들을 담고있다. 회룡봉학교를 졸업한 박남권 등 19명 회룡봉사람들이 뜻과 힘을 모아 2001년에 화강암으로 <<회룡봉혁명석굴>>기념비를 세워놓았다.

    그리고 회룡봉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는 룡두산에   혁명렬사기념비가 우뚝 솟아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영령들의 항일투쟁, 혁명투쟁의 이야기들은 두만강마냥 길이길이 전해지고있다. 이 기념비에는 29명의 항일렬사와 32명의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 렬사들이 새겨져 있으며 가장 간고한 나날에 모든것을 버리고 항일투쟁에 뛰여들어 생명을 바친 16명의 항일투사들의 고혼도 새겨져있다.  기재에 의하면 해방직후 쏘련에서도 렬사 21명 명단과 매인당 무휼금 40원과 당마크 하나씩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 기념비에는 이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회룡봉에 실은 100명의 렬사가 있는 셈이다. 1957년 당시 촌간부들의 창의와 광범한 렬사유가족, 회룡봉촌민들의 박절한 요구와 지지로  부지면적 31평방메터에 높이 9메터인 이 기념비를 자체로 세웠는데 이는 연변에서 유명하다.

회룡봉을 항일촌, 혁명촌으로 부르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두만강 강물마냥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1908년 홍수에 회룡봉엔  50∼60헥타르 되는 큰 섬이 생겼는데 농민들이 그 섬을 일구려하자 한 지방관리가 약삭빠르게 밭표를 사서는 자기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분개한 회룡봉사람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현에 상소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3년간이나 부패한 정부와 투쟁하여 끝내 그 관리를 관직에서 철직시키게끔 하였고 섬땅을 되찾아 팔아 1910년에 소학교를 세웠다.

    말하자면 이는 회령봉사람들의 개화운동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1999년까지 근 한세기 운영된 회룡봉학교에 관련하여서도 <<회룡봉>>촌사는  력래 학교정황과 졸업생정보를 보다 상세히 확보하고있다.  50년대로부터 배출된 98명의 대학생, 53명의 중등전문학교 졸업생 ,당정지도자, 군지도자, 박사, 교수, 법관, 공정사, 기업가 등 200명 인재들이 수록되였으며 그속엔 대한민국 상해림시정부 대표인물이며 재정을 장악했던 한형권, 중공 훈춘현 금구(경신_회령봉)위서기, 동북항일년군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지도한 안길(조선인민군 창건시기 총참모장),  박지영,  리봉수 등 회룡봉의 11대 특수인물, 11대 장령이 소개되여있다.  


    예로부터 회령봉을  인재촌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대개방, 대개발시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사회는 전례없는 격변기를 맞고있다. 우리의  력사, 문화를 어떻게 지켜가야하는가 하는 큰 숙제가 나서고있는 현시점에서 회룡봉사람들이 고향의 력사, 문화발전사를 정리하여 후세에 전해주는 일에 우선 마음을 모은일이 돋보인다.

    편집위원들을 살펴보면 회룡봉을 떠난 사람들과 현재 촌민 10여명으로 구성되였는데 대부분은 회룡을 떠난사람들이였다. 이들은 협심협력하여 광벙위한 자료수집에 로고를 아끼지 않았고 경비 또한 자체로 마련하여  근 3년간의 노력끝에 <<항일촌 혁명촌 인재촌<회룡봉>>>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촌사책을 회룡봉 집집에 한책씩 소지하게 하였고  회룡봉을 나간 회룡봉사람들에게, 회룡봉을 관심하고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있다.

    불과 33평방키로메터 되는 회룡봉에 많을 때는 200여호 살았었는데 지금은 120여호에 460명인구가 살고있다. 경작지 280여헥타르(논 61헥타르차지)의 농업수입외 기타수입이 거의 없는 편이다.   

    촌민들을 잘 살게 하고자 하는 고민이 제일로 크다는  회룡봉촌 안춘섭서기는 이미 회룡봉에 목축, 양식업발전전망계획을 내왔다고 한다. 경신진 서기겸 진장 김승덕도 이날 회룡봉_경신진  도로건설부터 하루빨리 개선할것이라며 회룡봉을 발전시킬데 관한 진의 계획과 의지를 표시하였다. 

    <<이땅에  살고있으면서도 자신의 뿌리와 력사에 대하여 잘 몰랐었다>>는 촌민들도 촌사책을 받아들고 감격하면서 새농촌건설에서 선렬들과 선배들에 부끄럽지 않게 고향을 잘 건설할것을 약속하였다. 


회룡봉촌의 서쪽에 위치한 <<회룡봉혁명석굴>>. 순 천연바위돌도 되었으며 석굴안 공간은 높이 1.5메터, 동서 1.8메터, 남북 4.8메터. 연변주의 력사문물단위.

   중공훈춘현위에서 내려온 주요한 지도자들은 늘 이 석굴에서 류숙하면서 금구의 중요한 회의를 소집하고 전단을 등사하던 곳이기도 한 이 석굴은 1933년 초, 일본 수비대와 자위단이 회령봉을 토벌할 때 항일투사 30여명이 피신했던 곳이며 연통라자 근거지로 물자를 수송하는 비상의 수송점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회령봉학교를 졸업한 박남권, 전관영 등 19명 애향지사들이 자발적으로 뜻과 힘을 모아 2001년 화강암으로 <<혁명석굴>>기념비를 재건해 놓았다.  지금도 들어가 볼수 있다.

회령봉 초벌등 산기슭에 100년 넘는  조선 전형적인 팔간기와집이 그대로 보존돼고 있어 회령봉의 력사를 말해주고 있다. 1952년 이집을 산 박영규로인(81세)의 소개에 따르면 이집은 유동렬이란 사람이 지은 집인데 워낙은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였다고 한다. 머슴으로 일하던 유동렬은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얼마안가 주인집에서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 땅에서 제대로 팔간집을 지어살아보리라는 소원으로 3년을 준비하여 지었다는 이 집은 목재와 석재위주, 우리민족 건축기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 집은 훈춘시의 문화유물로 지정되였다.  

1931년 훈춘현위 군사부장을 맡았었던 항일투사 박지영의 장남 박남표 ,84세, 15세까지 회룡봉에서 살았다.  항일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선친의 항일운동으로 유년 3년은 로씨아에서 ,동년과 소년시기12년을 중국에서 보내다가 15세에 회룡봉을 떠난 것이 그만  일본에서 7년을 살다 나중엔  한국에서 26년, 그후부터 지금까지 34년째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동아상업학교졸업, 일본중앙대학 법학과, 한국 륙군사관학교 대학원, 미국보병학교 , 한국 륙군대학, 국방대학 , 연세대학(석사)학력 소지. 한국 국방대학원 부원장, 론산훈련소 소장, 대한 싸이클련맹 회장, 한미 아보협회 임원 등 직을 력임해왔다.

    선친과 친인과 생리별하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박남표는 회룡봉에 있는 숙부 박우영과 1973년에 편지거래를 한 것이 그만 숙부를 <<계급립장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아픔도 겪었다고 한다. 1988년 고향 회룡봉을 방문한후로 <<회룡봉>>촌사가 출판되는 한가위에 즈음하여 다시 고향을 방문한 박남표는 당년 선친과 회룡봉사람들의 항일투쟁, 혁명투쟁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회억하면서 <<우리민족처럼 피눈물나는 력사를 겪은 민족도 흔치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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